[송호근 칼럼] 우보예찬
[중앙일보] 관련핫이슈[오피니언] 송호근 칼럼지난주 우리는 한 해의 마지막과 새해의 첫 자락을 동시에 통과했다. 한 주의 가운데에 나란히 놓인 섣달 그믐과 정월 초하루를 경과하면서 새로운 삶과 새로운 세상을 맞고 싶다는 의욕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것을 억제하지 못한다. 시간의 흐름에 어디 마디가 있으랴만, 낡은 것을 끊고 새것을 잇대면서 우리는 다소 안도한다. 뭔가 희망의 지평이 열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다. 지난해가 악몽이었으므로. 느닷없이 덮친 재난이자 절망의 터널로 돌진하는 급행열차였으므로. 이 급행열차가 터널의 초입을 겨우 통과하고 있을지라도, 악몽과 단절하고 희망과 접선하려는 자기 의례(儀禮)를 어떻게든 행했을 것이다. 추위를 무릅쓰고 산정 높이 올라가 해돋이를 보려는 억척스러움에 그런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송구영신(送舊迎新)은 현실을 변혁하려는 소망의 표현이고, 헌 것에 새 것이 오염되지 않게 하려는 경계 의식이다. 2009년, 기축년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새롭고 신선한 시간대를 기어이 침범하고야 말 작금의 위기는 선진국들의 협동 공세로도 잘 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11년 전 IMF사태 때만 하더라도 그것은 한국의 문제였고, 해법이 명확했으며, 미래가 예측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은 세계의 누가 자신 있는 묘책을 내놓고 있는가? 선진국들의 진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금융위기는 완전히 진압되지 않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모순들이 움틀 것이다. 금융위기 이후 우리는 차례로 닥쳐올 세기적 위기, 지구온난화, 인구 폭증, 식량과 에너지난의 중심부에서 거센 폭풍을 맞을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의 화두처럼 ‘온난하고(warm), 평평하고(flat), 복잡한(crowded) 지구’의 세기적 과제가 한국에 몰려드는 원년이 바로 2009년이라는 말이다. 세계의 처방이 불안하기만 한 지금, IMF 때와는 거꾸로 우리식 처방이 혹시 유용한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막연하나마 소띠 해 벽두에 떠오르는 ‘한우(韓牛)의 생동력’이 그런 예감을 갖게 만든다.
그게 환상일지라도 좋겠다. 소와 함께해 온 한국인의 생활양식과 그 각별한 인류학적 의미는 적어도 불안한 심정을 달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한국인에게 소는 카우보이의 괴성에 몰려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소떼들의 그 소가 아니었다. 투우사의 칼 끝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야 하는 그런 소도 아니었다. 한국인에게 소는 가축이자 가족이었다. 외양간을 부엌 지척에 지어 자식 대접을 했고, 가장에겐 듬직한 노동력이자 말벗이었다. 외국 소에 발병하는 광우병이 한우에게는 없는 까닭이다. 세계에서 발원한 ‘최악의 사태’가 덮칠 기축년의 불안한 시간들을 그런 한우의 늠름한 걸음걸이, ‘우보(牛步)의 미학’과 더불어 맞는 것은 어떨까 한다.
12간지 중 기는 것(뱀)과 나는 것(용)을 빼고 가장 느리게 걷는 동물이 소다. 가장 느릴 뿐만 아니라 가장 듬직하고 우직한 걸음이다. 쥐·닭·토끼는 방정맞고, 돼지는 뒤뚱거리고, 개와 원숭이는 천방지축이고, 호랑이와 말은 날쌔지만 다급하다.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런데, 소걸음은 우아하다. 그 육중한 몸의 균형을 결코 잃지 않으면서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옮겨 놓는다. 마치 장고 끝에 중대사를 결재하듯, 땅에 도장을 찍듯 발을 옮긴다. 느릿하지만 꾸준히 천리를 가고, 우직하지만 실족(失足)이 없는 게 ‘우보의 미학’이다. 소가 실족했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낙천적 표정, 신중한 결단, 듬직한 실행을 결합해 육중한 몸을 전진시키는 우보의 기품에서 2009년 정부·기업·가계를 운영할 지혜를 찾아내고, 그 세기적 재난을 감당할 여력을 얻어낼 수도 있겠다.
지난 2일 신년 연설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비상경제정부를 꾸리겠다고 천명했다. 전시 상황처럼 긴박하게 정부를 운영하겠다는 뜻이다. 7% 공약이 4%대로 내려앉고, 이제는 마이너스 성장만은 아니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된 ‘경제 살리기’ 정권의 애처로운 절규였지만 어찌하랴, 그것이 최선의 선택인 것을. 그런데 이 대통령이 주문한 ‘희망과 용기’는 선진국들이 행하는 재빠른 변신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세계의 공통처방을 예의 주시하고, 우리 체질의 생동력을 보강하는 고유 처방이 필요하다. 지난 4개월간의 고투에서 우리식 처방이 어느 정도 형체를 드러냈을 것이다. 저성장, 수출 감소, 채산성 악화, 도산, 실업, 가계 파산 등이 뒤섞인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 기어이 오고야 말 것이면, 용의주도한 관찰과 적확한 선택, 듬직한 결단과 우직한 실행으로 뚫고 나갈 수 있다. 우보의 지혜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