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아람 기자 aramu@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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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0.01.22 22:19
분류의 역사
알렉스 라이트 지음｜김익현·김지연 옮김｜디지털미디어리서치｜383쪽｜1만8000원
인터넷 검색 사이트가 도서관의 무겁고 방대한 백과사전들을 누르고 정보화 시대의 최강자로 떠오른 것은 수많은 정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중요도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보여줄 수 있는 '분류의 힘' 덕분이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기고하는 작가이자 정보 설계사인 저자는 인류가 이룩한 이 괄목할 만한 '분류' 성과의 원동력을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기술의 발달이 아닌 유전자의 힘에서부터 찾고자 한다.
'분류법'이라는 단어에서 상아탑 안의 단조롭고 고된 작업, 식물학과 동물학의 세세한 관점을 토론하는 창백한 대학원생의 이미지를 떠올린다면 오산이다. 현대인과 해부학적으로 유사한 인류가 나타난 10만년 전부터, 생물의 분류 작업은 인류의 가장 본질적인 문화활동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인류학자 브렌트 베를린은 어느 날 아구아루나 종족 안내원이 페루 열대우림을 걸어가면서 모든 식물과 동물의 이름을 막힘없이 이야기하는 것을 열중해서 들었다. 베를린은 그 종족이 나무에 대해 백과사전적인 지식과 정교한 분류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안내원은 나무와 동물을 종(種)·속(屬)·과(科)로 분류하고 있었는데, 이는 현대 생물학자들이 사용하는 18세기 식물학자 린네의 분류법을 연상케 했던 것이다.
▲ 디지털미디어리서치 제공
아구아루나 종족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원시 종족들은 고도로 발달된 나름의 분류체계를 가지고 있다. '민속분류(folk taxonomy)'라고 불리는 이 분류체계들은 '과'와 같은 카테고리를 사용하는 등 보편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수만년 동안 지리적으로 떨어져 발전한 문화들 사이에서 이처럼 유사한 분류법이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이를 인간의 '유전적 기질' 때문이라고 풀이한다. 저자는 "사물을 분류하는 능력은 인류의 위대한 진화론적 특징 중 하나일 것"이라면서 "인류는 지구에 출현한 이래 생존을 위해 주변 세계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배포해 왔다"고 주장한다. 고대 수렵채집 사회에서부터 인류는 살아남기 위해 어떤 동물을 먹을 수 있으며, 어떤 식물에 독성이 있는지를 판단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분류 성향을 갖고 태어나 독이 있는 뱀과 식용 버섯을 기억할 수 있는 개인이 그렇지 않은 개인보다 살아남아 번식에 성공할 기회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사회가 분화함에 따라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정보 또한 복잡다단해진다. 구술과 상징의 시대를 지나 정보를 보존할 수 있는 혁명적인 도구인 문자가 등장한다. 문자를 해독할 줄 아는 자가 정보를 독점하게 되자 권력을 잃을까 두려운 왕들은 문서를 엄격하게 통제한다. 기원전 3세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명을 내려 이전 정권의 지적 유산을 깨끗이 쓸어버린 후에 새로운 도서관 분류 시스템을 완성했다.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은 정보의 분류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저자는 인쇄본의 등장이 활자체의 표준화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인쇄본이 출현하면서 이전의 필사본 시대에 융성했던 고딕체는 새로운 명조체에 자리를 내주게 됐다. 저자는 "활자 표준화는 이어서 발생한 문화 간 정보 운동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면서 "독자와 작가들의 먼 네트워크를 가로지르면서 정보 흐름을 진척시켰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빙하시대의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낸 상징물에서 인터넷상의 이모티콘을 연상한다. 문자라는 새로운 매체에 매료돼 채색 필사본을 발전시킨 중세 아일랜드 필경사들로부터 인터넷이란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을 이용해 글과 이미지를 끼워넣는 현대 블로거들의 흔적을 찾아내기도 한다. 과거의 어느 한 지점과 현재의 어느 한 지점에 '하이퍼링크'를 걸며 인류의 역사가 낳은 방대한 '분류'를 이야기하는 저자의 사고법이 흥미롭다. 저자는 말한다. "기억의 미래는 우리의 머리가 아니라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34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