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사물(死物)일 뿐"
삶의 향기 몇 점
황동규 산문집｜휴먼앤북스｜274쪽｜1만원
박해현 기자 hhpark@chosun.com
입력시간 : 2008.09.27 08:46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은 황동규 시인의 산문집이다. 어느덧 고희를 넘긴 시인이 "기억력은 현저히 줄었어도 상상력은 시에서도 산문에서도 줄지 않고 더 끓고 있음을 느낀다"면서 지난 7년 동안 쓴 글들을 모았다. 시와 술과 꽃과 선(禪)과 음(音)의 입자들로 구성된 황동규 시인의 내면 풍경이 환하게 드러난다. 시인의 여기(餘技)가 아니라 그의 시집과 함께 음미해야 할 산문의 정수를 보여준다.
《삶의 향기 몇 점》이란 책 제목은 시인의 생사관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향기는 휘발성이지만, 시인은 그것에 육체성을 입혔다. 삶은 색(色)과 공(空)의 융합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삶의 한 과정이고, '죽지 않는 꽃은 가화(假花)'라고 시인은 말해왔다.
'삶은 계속해서 죽음을 향해 다가가지만, 죽음은 죽음대로 자기 식으로 삶을 연출한다.(중략) 죽음과 가까이 산다는 사실이 나에게 별로 겁을 주지는 않는다. 생물은 언젠가 죽는 것이고, 사실 죽기 때문에 생물인 것이다. 죽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사물(事物, 死物)일 뿐이다.'(94~95쪽)
'자신의 삶에 값 하는 죽음을 맞으려면 적어도 자신의 목숨보다는 더 의미 있는 것을 가지고 살다 죽음을 맞는 게 좋다.'(104쪽)
황동규.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황동규 시인은 시를 쓴다고 하지 않고, "시와 대화한다"고 말한다. 시신(詩神)은 종종 새벽 2~3시에 찾아와 시인을 깨운다. 곧바로 그는 컴퓨터를 켜고 시상(詩想)과 말을 주고 받듯이 천천히 쓰고 고치기를 되풀이 해서 한 편의 시를 빚는다. '시의 시작을 이루는 부분, 감정이나 생각의 엉킴을 푸는 것이 결국 시 쓰는 작업인데, 엉키는 것이 나한테 왔을 때 그것을 단칼로 풀려고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단칼 같은 메모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건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듯한 구절을 기록하는 것뿐이니까요.'(269쪽)
절제된 감성과 세련된 지성의 언어를 구사해온 황동규 시인은 체질적으로 보헤미안이 못 된다. 하지만 '몸은 비록 참담한 지상에 있어도 마음은 우주와 노는 보헤미안'(132쪽)의 삶을 동경해왔다. 김시습과 랭보 그리고 김종삼 등을 보헤미안 시인으로 꼽은 그는 '문체와 자기파괴와 자유와 댄디즘을 아울러 가지고 사는 알짜 보헤미안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됐다'(142쪽)고 탄식한다.
황동규 시인에게 시와 술은 '몰아(沒我)의 경지와 비극적 황홀이 담긴 베토벤의 음악'과 같다. 20년 전 의사가 고혈압을 다스리려면 술과 담배 중 하나를 끊으라고 했을 때 그는 그때까지 25년 동안 하루 두 갑 이상 피던 담배를 단박에 끊었다. '담배에는 황홀한 경지에 빠진다는 말은 없고 몽롱해진다는 말이 있다. 금연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황홀과 몽롱 사이의 선택이었다'(166쪽)는 것.
황동규 시인을 만난 기자는 시와 산문의 차이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시인은 시라는 노래의 억압을 견디는 사람"이라고 한 그는 "산문은 시인을 해방시킨다"고 답했다.
첫 산문집을 펴낸 황동규 시인.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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