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문화부 차장대우 scoop87@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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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05.19 22:40 / 수정 : 2009.05.19 22:40
▲ 김태훈 문화부 차장대우 조선일보가 1987년부터 진행해 온 교사 연수 프로그램인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은 일본 역사와 문화 속에 깃든 우리 문화의 빛나는 자취를 더듬어 보는 행사로 올해 24회째다. 기자는 탐방단을 동행 취재해서 지난 9일부터 15일까지 일본의 주요 역사 유적을 둘러볼 기회를 가졌다. 나라(奈良)·아스카(飛鳥)·교토(京都) 등 한국과 밀접한 교류 관계를 맺었던 지역들을 탐방했다. 그런데 고백하자면, 처음 떠날 때 "1500년 전의 까마득한 한일 고대 교류사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라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1인당 국민소득이 두 배나 벌어진 현실에 비춰 봐도 우리가 우위에 서서 문화를 전파했다는 사실이 '좋았던 시절의 옛 추억'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나 6박7일의 동행 취재를 통해 기자는 일본 속의 한민족사 탐방이 잘나갔던 옛 역사를 그리워하는 퇴행적 자위행위가 아니라는 증거들을 목격했다. 동행한 교수진으로부터 나라·아스카 지역에 백제와 고구려인이 남긴 자취에 대한 강좌를 들은 교사들의 반응부터가 그랬다. 김응순(45·부산중앙여중) 교사는 "우리가 문화를 전했다는 자부심 못지않게 문화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전파될 때 수용자에 의해 발전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박도성(46·동래중) 교사도 "유적지를 보고 나니 우리가 전한 문화가 일본의 현재에 어떻게 적용됐는지 궁금해졌다"고 거들었다. 그것은 '우리가 일본보다 잘났었다'는 자폐적 자부심이 아니라 '이웃나라 일본의 역사를 더 알게 됐다'는 미래지향적 관심이었다.
그렇다면 우리 학계는 이런 관심을 얼마나 수용하고 있을까. 탐방단과 동행한 손승철 강원대 사학과 교수는 의외의 사실을 알려줬다. 그는 "역사학계에서 일본에 가서 제대로 일본사를 공부하고 대학 강단에 선 학자는 30명이 채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일본사를 공부한 뒤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아까운 학자들도 부지기수"라는 말도 덧붙였다. 전통적으로 '동양사=중국사'로 파악해 온 역사학계의 인식이 일본사 연구의 공백 현상을 부채질했다는 것이다. 서정석 공주대 교수는 여기에 더해 "특히 일본 근대사는 우리의 식민 피해 역사와 겹치기 때문에 동아시아 각국에 미친 역사적 파장에 비해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고 심지어 외면당한 측면도 크다"고 말했다.
일본의 개항 이후 지난 150년간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축은 중국이라기보다 일본이라고 하는 것이 현실에 가깝다. 하지만 중·고교 세계사 교과서를 보면 일본 근대사는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함께 중국 변방의 역사로 기술되고 있을 뿐이다. 근대 이후 일본의 문물과 기술은 물론 심지어 학문 용어까지 수입하면서도 정작 일본사에 대한 세계사 내지 동아시아적 차원의 접근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중체서용(中體西用)'이니 '변법자강(變法自彊)'이니 요란하게 떠들다가 끝내 반(半)식민 상태로 전락한 중국의 실패한 근대사만이 지루하게 나열돼 있을 뿐이다.
탐방단과 함께 나라의 도다이지(東大寺)에 들렀다가 수학여행을 온 일본의 초등학생으로부터 "안녕하세요?"라는 한국말 인사를 받았다. 옆에 있던 여행사 가이드는 "한국에 오는 일본인들이 엔고 덕에 서울에서 돈을 펑펑 쓰고 대중문화에나 관심 갖는 건 아니다"라며 "일본 문화의 원류를 배우기 위해 부여와 공주를 찾는 이도 많다"고 말했다.
꿩은 매의 공격을 피할 수 없게 되면 머리를 땅에 처박고 자신이 처한 현실에 눈감은 채 최후를 맞는다고 한다. 불쾌했던 기억을 외면하다 자칫 역사의 꿩이 되는 것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