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동물들은 모르는 '생태통로'
영월=홍서표 기자 hsp@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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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9.11.26 03:10 / 수정 : 2009.11.26 08:36
백두대간 10곳 조사 동물 지나간 흔적 없어
엉뚱한 곳에 예산낭비 사후관리도 제대로 안돼
충북 제천에서 강원도 영월로 향하는 38번 4차선 국도를 가로지르는 구조물에 '야생동물이 지나가고 있어요'라는 문구가 있다. 야생동물을 위한 생태통로다.
하지만 24일 찾은 이 생태통로에는 동물 발자국이나 배설물 등 '이용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반면 통로 바로 밑 도로에는 동물의 피가 낭자했고, 도로변 수풀에 죽은 지 며칠 안 된 고라니가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동물을 위한 통로가 아닌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형적인 전시 구조물이다.
2004년 12월 영월군 남면에 준공된 이 '연정 동물 이동 육교'는 길이 60m, 폭 6m로 국토해양부가 만들었다. 도로로 끊긴 양쪽 야산을 이어주기 위한 것이지만 통로 폭이 너무 좁은 데다 동물들을 위한 숲길도 조성되지 않았다. 통로 바닥은 공사 과정에서 나온 폐석을 잘게 부순 쇄석(碎石)으로 채워졌다. 통로 양쪽 끝 숲과 너무 다른 '생뚱맞은' 모습이다.
더구나 통로 한쪽 끝으로 연결된 야산은 다른 2차선 도로가 산을 감싸듯이 지나고 있어 이미 생태계가 단절된 곳이다. 동물이 다니지도 않는 불필요한 곳에 생태통로를 설치한 것이다. 만드는 데 8억원이 들었다.
전국 도로 곳곳에는 야생동물이 도로를 가로지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생태통로(生態通路)'가 만들어져 있지만 동물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다. 형식적으로만 만들어 놓은 탓이 크며 관리도 되지 않고 있어서다.
▲ 38번 국도에 설치된 생태통로 아래에 차에 치여 버려진 고라니가 보인다. 생태통로 벽에 쓰인 ‘야생동물이 지나고 있다’는 문구가 무색하다/홍서표 기자
◆엉터리 생태통로
영월군 상동읍 31번 국도상에 있는 '화방재 생태통로'는 한쪽 끝이 절벽과 같은 급경사로 이어져 있다. 경사진 곳 아래는 계곡이다. 동물이 통로에 진입했다가 건너가지 못해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식물들이 자라도록 식생마대공법을 적용한 외벽은 풀이 자라기는커녕 곳곳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동물 이동을 살펴보기 위해 통로와 함께 2003년 설치한 CCTV 4대는 한 번도 확인한 적이 없다고 한다. 12억원이 투입됐다.
강원도 강릉시 왕산면 415번 지방도에 있는 '닭목재 생태통로'는 동물이 자주 이용하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지만 통로 한쪽 경사면이 무너지고 있어 보강이 시급하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6번 국도에 설치된 '진고개 생태통로'는 한쪽 끝이 계곡으로 떨어지는 절벽으로 만들어졌다가 통로를 연장하는 보강공사가 이뤄진 곳이다. 하지만 공사 과정에서 방수가 되지 않아 통로 아랫부분에 거대한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수분 공급이 안 되면서 풀과 나무가 자라지 못해 동물들이 평소 다니던 길과는 풍광이 다르다.
이처럼 전국에 설치된 생태통로 대부분을 동물이 외면하고 있다.
환경부 원주지방환경청이 최근 백두대간에 있는 생태통로 10곳을 조사한 결과 모든 시설에서 문제점이 발견됐다. 화방재, 진고개, 백봉령 등 3곳의 통로는 토양이 척박해 식물을 심고 관리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방재와 백봉령 통로는 외벽이 무너지고 있어 개보수도 시급했다. 삽당령과 진부령은 통로와 연결되는 펜스를 연장해야 한다고 지적됐고, 구룡령과 한계령 등 5곳은 쓰레기 투기 등 사람 출입 흔적이 역력했다.
원주지방환경청은 "도로 관리 당국이 통로를 만들어만 놓았을 뿐 사후 유지 관리는 제대로 하지 않는 실정"이라며 "많은 예산을 들여 거창하게 통로를 만들기보다는 수로나 교량 등 주변 지형·지물을 활용한 저비용 고효율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생태통로 존재조차 몰라
"관내에 그런 곳이 있습니까.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생태통로 관리 실태를 묻는 말에 한 도로 관리기관이 한 대답이다. 유지 관리는커녕 존재 여부도 모르는 것이 생태통로의 현실이다.
생태통로는 야생동물의 이동 통로로 도로와 댐 건설 등으로 인해 서식지가 단절되거나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공간이다. 작년 말 환경부가 조사한 전국 생태통로는 고속도로 45곳, 국도 213곳, 지방도(시·군도 포함) 133곳 등 모두 391곳이다. 터널형이 196곳으로 가장 많고 육교형 104곳, 박스·암거 등 기타가 91곳이다.
생태통로는 환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던 2006년 12월 정부가 '환경친화적인 도로 건설 지침'을 개정하면서 급속히 증가했다. 148곳(38%)은 지침이 시행된 2007년 이후에 설치됐다. 매년 수천건씩 발생하는 로드킬(roadkill) 사고도 생태통로 개설을 서두르게 했다.
생태통로는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1곳 설치에 필요한 예산이 수억원에서 수십억원에 달한다. 평균 10억원으로만 계산해도 생태통로 설치에 3900여억원이 투입된 것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효과에 대한 점검과 개선 대책은 뒤따르지 않고 있다. 도로 성격에 따라 국토해양부, 한국도로공사, 지방자치단체 등 관리 당국이 다르고 도로 유지 보수를 위한 예산은 있어도 생태통로 관리를 위한 예산은 없거나 소액에 불과하다.
원주지방환경청에서 환경성평가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야생동물연합 조범준 사무국장은 "로드킬은 교통사고와 인명피해로 이어지기 쉽다"며 "인간이 살기 위해서라도 야생동물 보호를 위한 생태통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충분한 현장 조사를 거쳐 필요한 곳에 설치해야 하지만 생태통로 상당수는 필요없는 곳에 만들어져 예산만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토해양부 산하 정선국도관리사무소는 "생태통로 설치는 도로 당국에서 하지만 설치 후 관리는 환경부서에서 하는 것 아니냐"며 "생태통로에 대한 사후 관리 예산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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