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log.donga.com/ranbi/archives/3667
권혁주란 이름의 현은 끊어지지 않았다
카테고리 : 공연을 만드는 사람들 | 작성자 : 양형모기자 2016-10-12 by 양형모기자
1.
“말도 안돼”하고 입을 막았다. [단독]을 달고 나온 기사라 처음엔 의심했었다.
아니, 의심하고 싶었다.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가 갔다. 1985년생이니 고작 서른 하나.
10월12일 새벽 1시 27분이 권혁주의 공식 사망시간이다.
권혁주는 이 시간,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한 호텔 앞에 멈춰 선 택시 안에 있었다.
잠이 든 줄 알았던 택시기사가 그를 깨웠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호흡은 이미 멈춰져 있었다.
호텔직원이 달려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지만 권혁주는 눈을 뜨지 않았다. 사인은 급성심정지.
권혁주는 12일 저녁 부산 문화회관에서 연주를 하기로 되어 있었고, 숨진 날은 부산의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신 것으로 확인됐다.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폭주를 한 것은 아니었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의 보도자료에 따르면 권혁주는 숨지기 전 친구들을 만나 정종 몇 잔을 마셨다고 한다.
권혁주는 연주 전날부터 철저히 컨디션을 조절하는 연주자로 알려져 있다. 리허설 시간에도 늘 20분 정도 먼저 도착해 준비를 한다.
권혁주는 우리나라 클래식계의 가장 빛나는 젊은 별 중 하나였다. 3세에 바이올린 활을 잡은 신동 중의 신동이었다. 그가 러시아로 유학을 떠난 것은 고작 9세 때였다.
11세에 차이콥스키 청소년 국제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세계가 주목하기 시작했다. 파가니니 국제바이올린콩쿠르에서 우승한 것이 2004년. 권혁주의 나이 19세였다.
권혁주는 세계무대에서 한국 젊은 음악가의 실력과 재능을 알린, 이른바 한국 클래식 음악영재의 1세대로 꼽힌다. 2006년 제2회 금호음악인상을 받았다.
2.
개인적으로 권혁주의 연주를 좋아했다.
인연이 있는지, 그의 연주를 자주 보고 들었다. 딱히 그를 의식하지 않고 콘서트장을 찾아도 그는 독주자로서 혹은 협연자나 앙상블의 멤버로 어김없이 바이올린을 들고 나타났다.
“또 권혁주야?”싶을 정도로 그는 내 눈 앞에 자주 등장했고,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도 기쁘게 그의 연주를 들었다.
클래식 연주회장의경우 연극이나 뮤지컬 공연장에 비해 현저히 방문기회가 적은 나 같은 사람 앞에 “또 권혁주야?”할 정도로 자주 나타났다면, 사실 이유는 하나다.
연주회가 참 많았다. 그것도 건강을 심하게 해칠 정도로.
권혁주의 연주 스케줄은 다이어리가 미어터질 정도로 빽빽했다고 한다. 거기에 늘 자가운전으로 이동했다. 자동차와 운전을 좋아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번인가 권혁주의 연주에 대한 기사를 썼다. 옛날 자료를 뒤적이다 보니 20015년 4월에 쓴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금호아시아나솔로이스츠의 러시안 시리즈 연주회에 대한 간단한 리뷰였다.
이날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는 김재영과 함께 프로코피예프의 ‘두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C장조 op.56′을 연주했다. 나는 ‘대화라기 보다는 논쟁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썼다.
2부에서 권혁주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와 현을 위한 오중주 G단조’를 연주하기 위해 바이올리니스트 김재영, 비올리스트 이한나, 첼리스트 김민지, 피아니스트 손열음과 함께 또 다시 무대에 올라왔다.
“출발의 표정이 꽤 심각한 곡이다. 그럼에도 권혁주란 연주가는 뭘 연주해도 편해 보인다. 그의 현은 울부짖을지언정, 그의 표정은 느긋하기만 하다. 가끔은 그 표정이 얄미울 정도다”라고 썼다.
뒤늦게 이 기사를 본 권혁주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링크하며 이렇게 댓글을 달았다.
“기자님이 안티, ㅎㅎㅎ”
권혁주의 가슴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현의 소리를, 그 느긋한 얼굴을 다시는 마주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한 번이라도 더 보아두고, 들어두었어야 했다.
젊은 별은 이렇게 잔인하게 아름다운, 피우다 만 꽃을 남겨두고 갔다. 권혁주의 명복을 빈다.
나는 생전의 그의 모습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남긴 음악을 들을 것이다.
권혁주는 갔지만, 권혁주란 이름의 현은 결코 끊어지지 않을 테니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