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삼희의 환경칼럼] 또 하나의 '회색 코뿔소' 화학 공장 사고
조선일보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입력 2020.06.24 03:20
작년과 올해 화학 공장 잇단 사고… 재앙적 사고의 사전 경고 아닌가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한삼희 선임논설위원
2013년 다보스 포럼에서 '회색 코뿔소(grey rhino)'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저널리스트이자 위기 전문가인 미셸 부커가 그때까지 유행하던 '검은 백조(black swan)'의 대비 개념으로 제시했다. 검은 백조는 일어나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나 세계를 충격과 혼란에 빠뜨리는 경우를 말한다. 검은 백조 개념을 만들어낸 나심 탈레브는 1차 세계 대전, 소련 해체, 9·11 같은 것을 예로 들었다. 반면 회색 코뿔소는 뻔히 눈에 보이고 많은 사람이 경고하는데도 사전 대처를 소홀히 했다가 당하고 마는 위기를 뜻한다.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검은 백조가 나타나 세상을 뒤집어 놨다면, 그걸 미리 막지 못했다고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회색 코뿔소는 다르다. 회색 코뿔소는 사람들이 다 알고 있고 본 적도 있는 실체다. 중량 2t짜리 회색 코뿔소가 쿵쿵 바닥을 치며 돌진해온다. 전문가들이 "대비하라"고 외쳐왔다. 미국에선 작년 1~8월 중국 발원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시카고로 들어와 미국민 1억1000만명을 감염시키고 58만명이 사망한다는 '크림슨 컨테이전'이라는 코드명의 모의 훈련을 했다. 거기서 수많은 취약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트럼프의 백악관은 이를 무시했고 미국은 현재 코로나 확진자 230만명, 사망자 12만명의 끔찍한 피해를 겪고 있다. 전형적인 회색 코뿔소이다.
인간 사회가 겪는 대부분 위기는 검은 백조가 아니다. 회색 코뿔소를 사전에 대비하지 않아 당하는 위기들이다. 그 위기가 언제, 어떤 형태로 닥쳐올지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코뿔소의 희뿌연 윤곽 정도는 알아볼 수 있다. 그것들이 뿜는 콧김과 쿵쿵 울리는 땅의 진동을 느낄지도 모른다. 회색 코뿔소는 올지 안 올지가 아니라 언제 올지 시기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한테는 화학 공장 사고가 또 하나의 회색 코뿔소일 수 있다고 본다. 작년과 올해 연이어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 충남 대산화학단지에 사고가 몰리고 있다.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든다. 우선 작년 5월 충남 서산 대산화학단지의 한화토탈 공장에서 유증기 확산 사고가 있었다. 화학물질 저장 탱크의 과열 반응 때문이었다. 무려 2300명의 주민과 직원들이 병원 진료를 받았다. 아수라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올 3월, 이번엔 롯데케미칼 대산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있었다. 미사일이 터졌나 할 정도의 굉음으로 공장 주변 건물들 유리창이 깨져나갔다고 한다. 직원, 주민 등 56명이 병원 치료를 받았다. 피해 신고는 2000건을 넘었다. 5월 19일엔 LG화학 대산공장에서 화재 사고로 직원 1명이 죽고 2명이 다쳤다. 큰 사고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인도의 LG 폴리머스 화학 공장 유독가스 누출 사고 12일 뒤의 일이었다. 인도 공장 사고로 12명이 숨졌고, 1000명이 병원 치료를 받았다. 현지 주민들이 길거리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는 동영상이 SNS로 유포됐다. 인도 당국은 반경 5㎞ 내 주민 1만명을 대피시켰다.
1984년 인도 보팔 유니언 카바이드 농약 공장 유독가스 유출 사고 때는 57만명이 피해를 봤다. 공식 사망자는 3700명인데 직간접 사망 다 합치면 1만~2만명이라고 한다. 대형 화학 공장에서 사고가 터지면 수습 불가능한 규모일 수 있다. 2012년 9월 구미공단 불산 사고 때는 영세 공장 탱크로리에서 8t의 불산 가스가 유출됐을 뿐인데도 5명이 죽고 1만1000명이 병원 치료를 받았다. 100만평 농경지도 오염됐다. 울산, 여수 석유화학산업단지는 생긴 지 50년이 됐다. 대산화학단지도 29년이다. 오래된 배관과 밸브 등이 물리적 마모와 화학적 부식으로 노후화한 곳이 적지 않을 것이다.
구광모 LG 회장이 지난달 20일 화재 사고가 난 대산공장을 방문해 "기업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은 경영 실적이 나빠져서가 아니라 안전, 품질 사고 등 위기관리에 실패했을 때"라면서 "안전, 환경을 경영의 최우선 순위에 둬야 한다"고 했다. 기업 오너의 이런 경각심 촉구가 필요하다. 오너 입장에선 계열사 공장 가운데 어느 한 군데서라도 대규모 화학 사고가 난다면 기업의 운명이 걸린 일이 된다. 반면 계열사 사장이나 공장장들은 자기 임기 중 사고를 겪을 확률은 극히 미 미하다고 느낄 것이다. 일어날 것 같지 않은 극미한 확률 때문에 공장을 세우고 큰돈을 들여 노후 설비를 보수하려 나서기는 쉽지 않다. 그보다는 안전 관리 인력을 줄이고 보수 정비 비용을 아껴 단기 성과를 올리려는 유혹에 끌리기 쉽다. 이런 상황에선 오너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화학 공장 사고는 '언젠가 꼭 나타나고 마는' 회색 코뿔소로 덮쳐올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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