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매일 마시지만… 우린 '얼음의 일각'밖에 모른다
얼음이 없었다면 지구는 얼어죽었다
지구를 떠나 9년 6개월간 48억㎞를 날아간 외로운 우주탐사선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얼음산이었다. 지난 14일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무인 우주탐사선 '뉴호라이즌스(New Horizons)'가 보내온 명왕성 사진에는 3500m 높이 산맥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미국의 로키산맥에 비견되는 규모의 이 산맥이 지구의 산과 다른 점은 '얼음'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NASA는 "이렇게 단단하고 거대한 산을 형성할 수 있는 물질은 얼음뿐"이라며 "명왕성 곳곳을 이런 얼음 산맥과 얼음 평원이 덮고 있다"고 밝혔다.
◇'얼음'은 우주의 씨앗
과학자들은 명왕성에 얼음이 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표면 온도가 영하 230도인 명왕성에서는 모든 것이 얼어붙기 때문이다. 지구에서는 수소 원자 2개와 산소 원자 1개로 만들어진 물(H₂O)을 고체(얼음), 액체(물), 기체(수증기) 등 세 가지 상태 모두 볼 수 있다. 하지만 지구 밖의 우주 공간은 대부분 영하 200도 이하다. 별과 가까운 행성은 수백 도가 넘는다. 화성, 목성에서도 아직은 얼음만 발견됐고 토성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띠 역시 얼음이다. 지금까지 물이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확인된 것은 지구뿐이다.
강헌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액체 상태의 물을 연구해왔지만, 실제로 우주에서 가장 흔한 물의 형태는 얼음"이라며 "얼음은 우주 탄생의 원동력이자 씨앗"이라고 밝혔다. 꽁꽁 얼어붙은 물에 불과한 얼음이 어떻게 우주를 만들었을까. 빅뱅 이론에서는 138억년 전 우주가 한 점에서 폭발한 뒤 급속히 팽창했다고 본다. 이때 만들어진 초기 물질들은 서로 부딪치고 결합하면서 물, 일산화탄소(CO) 등 간단한 분자가 됐다. 차갑게 식어 있는 우주에서 물 분자는 모래 먼지와 함께 얼어붙어 작은 얼음 알갱이가 돼 우주 공간을 떠다녔다. 얼음 알갱이에 다른 얼음이나 분자가 충돌하면 차가운 온도 때문에 그대로 달라붙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얼음 알갱이는 점점 커지고 주변 물체를 끌어당기며 자랐다. 별과 행성이 만들어진 원리다. 강 교수는 "어느 정도 크기가 커지면서 얼음과 먼지가 단단하게 뭉치고, 이 과정에서 화학반응이 일어나 복잡한 분자가 새롭게 만들어지기도 한다"면서 "똑같이 수소와 산소로 구성돼 있더라도 얼음 구조와 밀도는 만들어지는 압력과 온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때문에 얼음 알갱이 종류에 따라 다양한 분자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얼음 구조는 16가지나 되고, 이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분자의 가짓수는 무궁무진하다. 실제로 지구에 떨어진 운석에서는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분자가 발견되는 일이 많다. 특히 얼음 알갱이 내부의 화학반응은 단백질 구성 성분인 아미노산도 만들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생명공학자들은 이 아미노산이 우주 공간을 떠돌다가 40억년 전 지구에 도착, 생명으로 진화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얼음이 만들어내는 우주는 진행형이다. 우주는 여전히 얼음으로 가득 차 있다. 허블 우주망원경이 보내오는 은하와 성간 사진이 신비로운 색을 내는 것도 수많은 얼음 알갱이 덕분이다. 수천만 년 이상이 지나면 이 얼음에서 또다시 새로운 별과 행성이 만들어질 것이다. 명왕성을 지난 뉴호라이즌스가 향하고 있는 태양계 끝자락의 '카이퍼 벨트(Kuiper belt)' 역시 얼음 왕국이다. 이곳에는 50억년 전 태양계가 형성되던 당시 더 이상 커지지 못하고 일정 수준에서 멈춰버린 소행성과 얼음 알갱이들이 구름처럼 퍼져 있다. 태양계를 만들고 남은 재료 창고인 셈이다. 카이퍼 벨트는 긴 꼬리를 밤하늘에 뿌리며 날아가는 혜성(彗星)의 고향이기도 하다. 혜성의 긴 꼬리는 태양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녹은 혜성의 얼음이 흩날리면서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주인공 쿠퍼가 얼음으로 뒤덮인 '만행성'을 둘러보고 있다. 우주 공간에서는 물이 액체가 아닌 얼음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워너브라더스 제공
◇얼음 덕분에 생명이 있다
얼음은 지구에서도 생명과 중요한 연관이 있다. 지구는 24억년 전 갑자기 얼어붙기 시작했다. '빙하기(氷河期)'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4차례 빙하기가 있었는데, 왜 이런 빙하기가 시작됐는지는 아직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구 기후가 빙하기를 벗어나 온화하고 따뜻하게 변화하면서 인류가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하는 문명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불과 1만2000년 전이다.
빙하기를 거치면서도 지구상에 생명이 사라지지 않은 것은 '얼음의 축복' 덕분이다. 물질 대부분은 액체에서 고체가 되면 부피가 줄어든다. 액체 상태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던 분자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이면서 고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은 반대다. 얼음은 물 분자 6개가 연결되면서 빈 공간이 많은 독특한 6각형 기둥 모양으로 만들어진다. 내부 공간이 크기 때문에 액체 상태 물보다 부피가 9% 정도 늘어난다. 적은 양의 분자로 형성된 물질의 부피가 더 커졌다는 것은 밀도가 낮아졌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얼음은 물 위에 뜬다. 날씨가 추워지면 호수나 강, 바다는 위쪽부터 얼기 시작해 아래쪽으로 얼음이 커진다. 얼음이 물보다 가볍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결국 한겨울에도 얼음 밑에는 물이 남아 있고, 물고기를 비롯한 수중 생태계는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지구에서 탄생한 초기 생명체가 빙하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것도 꽁꽁 얼어붙은 바다 밑에 물이 남아 있었던 덕분이다.
기후와 지질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남극이나 그린란드의 빙하는 '지구의 과거'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빙하는 오랜 세월에 걸쳐 내린 눈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땅의 퇴적층과 마찬가지로 그 시기 환경을 알 수 있는 정보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과학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것은 빙하 속에 갇혀 있는 기포(氣泡)와 얼음의 성분이다. 기포는 눈이 내렸을 당시의 대기 조성을 알려준다. 빙하를 이용하면 최대 80만년 전의 지구 기후에 대한 정보까지 알 수 있다. 이산화탄소 등 온실가스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도 빙하 속의 기포 분석을 통해 증명했다.
기온 변화는 얼음을 구성하는 물 분자를 이용해 파악한다. 지구상 산소는 중성자가 6개인 가벼운 산소와 8개인 무거운 산소가 있다. 어떤 산소로 물이 만들어졌느냐에 따라 물 역시 가벼운 물과 무거운 물이 있다. 기온이 높은 해에는 무거운 물이 증발하는 양이 많아진다. 증발한 물은 비나 눈이 돼 내린 뒤, 남극이나 그린란드의 빙하로 만들어진다. 어떤 시기에 만들어진 빙하에 무거운 물이 많이 포함돼 있다면, 그해 기온이 높았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빙하를 이용한 기후 연구는 남극 등에서 '아이스 코어(ice core)'라는 얼음 기둥을 뽑아내는 형태로 진행된다. 이렇게 뽑아낸 얼음 기둥이 지구 역사를 담은 역사책이 되는 것이다.
'얼음'이라고 똑같이 부르지만, 지구상 얼음은 천의 얼굴을 갖고 있다. 연회장 조각에 쓰는 유리처럼 투명한 얼음도 있고, 추운 겨울날 강이나 호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불투명한 흰색 얼음도 있다. 북극이나 남극 지방의 빙하나 빙산도 대부분 불투명한 얼음이다.
순수한 물이 얼어붙으면 투명한 얼음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물 분자가 얼어붙는 과정에서 액체에 녹아 있던 질소·산소·이산화탄소와 같은 분자들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기포 상태로 얼음 속에 갇히게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얼음 속 작은 기포가 얼음을 통과하는 빛을 산란시켜 버리기 때문에 불투명하게 보인다. 수정처럼 투명한 얼음을 만들고 싶으면 물이 어는 동안에 물속에 녹아있던 기체가 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투명한 얼음을 만들려면 '천천히' 얼리면 된다. 아예 뜨거운 물을 얼리면 더 투명한 얼음을 만들 수 있다.
◇물질의 성질 바꾸는 '얼음 화학'
냉장고의 발달로 어느 곳에서나 쉽게 얼음을 볼 수 있는 시대지만, 여전히 얼음은 미지의 존재다. 얼음은 분자 구조나 분자 간 반응을 연구하는 과학 분야인 '화학(化學)'에서 철저히 소외된 존재였다. 모든 화학반응은 온도가 높을수록 활발하게 일어난다. 이 때문에 온도가 낮은 얼음은 화학을 연구하기에 부적합한 상태라는 것이 화학자들의 생각이었다. 얼음 상태에서는 분자의 이동이나 화학적 변환 등이 불가능하며, 만일 일어난다고 해도 엄청나게 느리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얼음 표면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연구하는 과학자가 늘고 있다. 이런 연구 분야를 '얼음 화학'이라고 한다. 얼음 표면은 내부와 달리 분자 이동이 가능하고, 화학반응도 일어난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특히 얼음 표면의 화학반응은 반응 중간에 멈추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일반적 화학반응을 서울에서 부산까지 달리는 직행열차라고 하면, 얼음 표면의 화학반응은 수원, 대전, 대구 등 중간 역에 멈출 수 있다는 것이다. A 물질과 B 물질이 반응하면 C가 되지만, 얼음 위에서 A와 B를 반응시키면 D나 E도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액체인 물에서는 수소와 염소로 완전히 분리되는 강한 산(酸)인 염산(HCI)이 차가운 얼음 표면에서는 일부만 분리돼 약한 산이 된다. 얼음 표면의 물 분자가 염산의 화학적 성질을 바꿔버린다는 뜻이다. 얼음의 이런 성질을 이용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화학반응을 일으키거나,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강헌 교수는 "얼음 화학을 연구한다는 것은 결국 기존 상식으로는 알 수 없는 수많은 화학반응을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여는 것"이라며 "화학반응이 일어나기 어려운 차가운 우주 공간에서 다양한 물질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까닭도 얼음 화학을 통해 밝혀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그룹은 강 교수의 '얼음 화학'을 2013년 '삼성 미래 기술 육성 사업'의 첫 지원 대상으로 선정했다. 얼음 화학이 노벨 과학상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분야라는 것이 삼성의 판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