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의 신(神)' 고해성사하다
18년간 FRB 의장으로 군림했던 앨런 그린스펀
이젠 금융위기 부른 주범으로 美청문회선 온통 성토·비난
"백년만에 한번 있을 신용 쓰나미 저도 충격… 잘못 있었습니다"
뉴욕=박종세 특파원 jspark@chosun.com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 로이터'격동의 시대'는 앨런 그린스펀(Greenspan·82) 전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을 천당에서 지옥으로 끌어내렸다.
미 경제 호황기를 이끈 공로로 '마에스트로' '경제대통령' '경제의 신(神)' 등 화려한 찬사를 받았던 그린스펀 전 의장은 이제 최악의 경제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으로 몰려 청문회에 섰다. 23일 미 하원 감독·정부개혁 위원회 청문회는 지금까지의 '그린스펀 주연(主演)' 청문회와는 완전히 달랐다. 과거 "미국 경제는 당신에게 빚을 졌다"고 칭송했던 미 의회는 그를 세기적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몰아 죄를 추궁했다.
그린스펀의 얼굴엔 웃음기가 가셨다. 바짝 타는 입술로 현재의 금융위기에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의 준비된 원고를 읽는 그린스펀에게 의원들은 "잘 안 들린다"며 마이크를 바짝 들이댈 것을 여러 차례 주문했다. 의원들의 날카로운 질문 공세에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살얼음 밟듯 조심스럽게 단어를 골라 부인하고, 회피하고, 그리고 시인했다.
1987년 레이건 전 대통령에게 FRB 의장으로 발탁돼 18년6개월을 금융사령관으로 재직한 그린스펀은 미국 현대금융사 그 자체였다. 1990년대 미국의 호황기를 구가하고 인플레 없는 세계경제를 이끌며 블랙 먼데이, 9·11 테러, 닷컴버블을 헤쳐 나왔지만 결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그가 2001~2004년까지 유지했던 초저금리 정책은 주택버블을 키웠고, 그의 감독 소홀은 방만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을 방조했으며, 월가(街)에 대한 극단적인 규제완화정책은 신용부도스와프(CDS)라는 괴물 파생상품을 키워내고 말았다. 그는 자서전 '격동의 시대'에서 지난 25년을 '시장자본주의 힘의 재발견'으로 정의(定義)했으나 그 정의가 이제 무너졌다.
"당신의 이데올로기가, 하지 말았어야 할 결정을 내리도록 한 것 아닌가."
헨리 왝스먼(Waxman) 청문회 위원장은 이날 그린스펀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했다. 왝스먼은 그린스펀 철학의 근간인 시장경제와 극단적인 자유방임 이데올로기를 공격했다.
그린스펀은 시인했다.
"오류를 발견했다. 이 오류가 얼마나 중요하고 지속될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사실로 매우 곤혹스럽다."
그는 최근 국제 금융위기를 정책결정자들이 예상하지 못한 "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신용 쓰나미(지진해일)'"라고 규정했다. "지난 40년 이상 경제이론이 아주 잘 들어맞고 있다는 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최근 사태에) 충격을 받았다"고도 했다.
청문회 4시간 동안 그린스펀이 고해성사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경제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주장은 거부했고, 부분적인 오류만 시인했다. "부동산 시장은 국지적 시장이어서 전국에 걸쳐 광범위하게 가격이 하락할 줄 몰랐다"거나 "주주의 이익을 지키려 하지 않은 월가가 문제"라며 책임을 회피하고 떠넘겼다.
그린스펀은 자서전에서 줄리아드 음대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하고 직업 뮤지션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겪었던 폐결핵의 고통과, 뒷날 이룬 자신의 화려한 업적을 그리고 있다. 하지만 책에서 그린 자신의 업적이 말년에 부메랑이 돼 돌아올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격동의 시절에 그는 너무 오랫동안 FRB 의장을 맡았는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