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일 동료 소방관 3명이 숨진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한 나이트클럽 현장에서 한 소방대원이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20일 오전 5시 25분쯤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여인도시' 나이트클럽에서 화재가 발생해 불을 끄던 소방관 3명이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려 숨졌다.
숨진 소방관은 조기현(45)·김규재(41) 소방장과 변재우(34) 소방사 등 3명으로 모두 은평소방서 녹번119안전센터 소속이다.
이들은 건물 주차관리인인 고모(69)씨 신고를 받고 오전 5시 27분쯤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 건물 내부로 들어가 화재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10여 분 만인 오전 5시 40분쯤 무대 천장에 설치된 대형 조명과 철 구조물이 무너지면서 이들을 덮쳤다.
초·중학생인 아들과 부인을 둔 40대 가장,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30대 노총각, 아직 미혼인 40대 중반의 남자가 그렇게 숨졌다.
◆사고 순간
숨진 조 소방장 등은 24시간 교대근무 방식에 따라 전날 오전 9시 출근해 밤을 꼬박 새우며 20시간 이상을 근무하고 있었다. 4인 1실의 15㎡(4평) 남짓한 출동대기실의 좁은 침대에서 비스듬히 누워 쉬고 있었다.
출동 명령이 떨어진 것은 오전 5시25분. 이들이 화재 현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건물 뒤쪽 지붕으로 시커먼 연기와 불꽃이 치솟고 있었다. 소방관 경력 17년과 15년의 조·김 소방장이 앞장을 섰고, 지난해 4월 소방관이 된 변 소방사가 뒤따라 나이트클럽이 있는 건물 2층으로 들어갔다. 나이트클럽 영업은 끝났지만 혹시라도 남아 있을지 모를 사람을 구하고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의 뒤를 이어 소방관 170여 명과 소방차 30여 대가 현장에 속속 도착했다. 건물 내부는 이미 화염과 유독가스가 가득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함께 진화 작업을 벌였던 동료 소방관들에 따르면, 조 소방장 등이 무대 오른쪽 불길을 잡으려던 순간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3층에 매달려 있던 대형 무대 조명과 천장을 장식하려고 설치한 두께 15㎝의 철근 지지대가 무너져 내렸다. 천장 일부도 구멍이 뚫리면서 함께 무너졌다. 조씨와 김씨는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건물 더미에 깔렸고, 변 소방사는 무대 옆 룸으로 피했지만 3층 지붕도 무너지면서 끝내 화를 입었다.
◆술 마시고 춤춘 사람들이 떠난 뒤
조 소방장 등이 신고를 받고 출동하기 불과 1시간여 전까지만 해도 '여인도시'는 100여 명의 손님들로 붐볐다. 이 나이트클럽은 전날 오후 6시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밤 11시까지는 주로 40~50대 중년 남녀들이 많았다. 한 종업원에 따르면 '땡벌' '무조건'과 같은 트로트 가요와, 트로트 인기 가요를 빠른 댄스 리듬으로 편곡한 '나이트 트로트 메들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자정이 지나자 손님들이 30대 초·중반으로 물갈이됐다. 음악도 인기그룹 '원더걸스'의 '소핫(So Hot)', 이효리의 '유 고 걸(U-Go-Girl)' 등 빠른 템포의 최신 인기가요를 리믹스한 노래가 귀가 먹먹하도록 울렸다. 무대 오른편에는 '룸(room)'이 2층에 9개, 3층에 2개 등 11개가 있다. 한 종업원은 "'룸'을 이용하는 손님들은 춤추기보다는 '부킹(짝짓기)'에 더 집중한다"며 "눈 맞은 남녀들은 인근 모텔로 직행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나이트클럽 반경 30여m 이내에는 R모텔 등 모텔만 4개가 있었다. 나이트클럽은 20일 새벽 4시쯤 영업이 끝났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손님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 소방장 등이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를 사람'들을 구하러 들어갔을 때는 영업이 끝난 뒤라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 20일 서울 은평구 대조동 나이트클럽 화재를 진압하다 숨진 소방관들. 영정은 왼쪽부터 조기현 소방장, 김규재 소방장, 변재우 소방사. 변 소방사 어머니가 영정앞에서 통곡하고 있다.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위험수당 5만원
이날 숨진 소방관 3명은 위험수당으로 한 달에 5만원을 받았다. 빈소가 차려진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유족들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오열했다.
지난해 남편과 딸을 잃고 마지막 남은 외아들인 변재우 소방사마저 보낸 최매자(여·67)씨는 "35살에 낳은 아들인데 내 새끼 얼마나 뜨겁게 죽었겠어"라며 통곡했다. 최씨는 "아직 장가도 못간 재우가 지난 주말 부산에 있는 애인을 만나고 왔다"며 "이러니 누가 소방관에게 딸을 주겠느냐"고 울부짖었다.
변 소방사는 지난해까지 강원도 군부대에서 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아버지와 여동생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위암 수술을 받은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서울에 와서 소방관 시험에 응시했다.
김규재 소방장은 부인 문은실(40)씨와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인 두 아들을 두고 떠났다. 아내 문씨는 "(남편을) 이렇게 보낼 수 없어. 나하고 애들은 어떻게 살라고"라며 오열했다. 소방관 15년차인 김씨의 월급은 280여만원이었다. 2남2녀 중 막내인 김씨는 고양시의 25평 아파트에 살면서도 매달 어머니와 조카들의 용돈을 꼬박꼬박 챙겨줬다고 한다. 김씨의 어머니는 "일요일에 아버지 산소에 벌초하러 가자더니…"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조기현 소방장은 독신이다. 그는 동료들 사이에서 형제 소방관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형 조민우(49) 소방위는 "가슴이 답답해, 답답해"라고 연발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변 동료들은 "동생에게 소방관을 권유해 십수 년을 함께 '형제 소방관'으로 일했기 때문에 고통이 더 클 것"이라고 말했다.
숨진 세 소방관에게는 1계급 특진과 함께 옥조근정훈장이 추서되고, 영결식은 22일 오전 9시 서울 은평소방서에서 은평소방서장으로 치러진다.
▲ 20일 오전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한 나이트 클럽에서 불이나 이를 진압하려던 소방관 3명이 숨졌다. /이재호기자 superjh@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