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좋은 나무는 없다
19세기 미국의 문필가 헨리 D 소로는 '가을의 빛깔(Autumnal Tints)'을 높이 찬양했다. 나뭇잎에 물드는 홍조를 보고서는 "자연의 훈장"이라고 했다. 생장에서 죽음으로 귀결되는 성공의 표상이라는 것이다. 가을을 달구는 레드메이플에 대해서는 "나무 전체가 즙이 흐를 정도로 잘 익은 과일같다"고 묘사했고, 느릅나무는 "오븐에 갓 구워낸 갈색"으로 예찬했다.
그러나 범부의 11월은 착잡하다. 한해의 끝물이 속절없이 아쉽거니와, 수목에서 느껴지는 조락과 좌절의 징후가 가슴 바짝 와닿기 때문이다.
실제로 주변의 나무를 돌아보면 딱하지 않은 것이 없다. 사람들에게 맛난 육질을 제공하던 유실수의 가을은 더욱 초라하다. 자두에서 사과, 배, 감, 복숭아, 살구, 매실에 이르기까지 과일을 생산한 나무는 힘이 달려서인지 목재로서는 빵점이다. 홍시는 달지만 감나무는 땔감으로도 시원찮다. 그나마 모과가 격을 지키고 있는데, 그 열매를 과일축에 넣어야 할지 모호하다. 은행의 유용함은 일찌감치 냄새가 갉아먹었으니 말할 것도 없고.
꽃나무의 가을도 시련이다. 개나리, 벚나무, 목련 등 봄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나무는 숲의 변방에서 숨죽여 지내고 있다. 상춘의 추억만 간직한 채 침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복락의 상징인 모란을 보라. 줄기가 부지깽이보다 못한 형상이다.
꽃과 열매에서 자유로운 나무라고 모두 가을이 편한 것은 아니다. '단풍의 여왕'으로 불리는 복자기(복분자가 아니다!)는 10월의 선홍빛 아름다움은 오간 데 없이 지금 흙탕물을 쓰고 있다. 봉황을 깃들이고 거문고를 만들던 오동나무 또한 덩치를 수습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겨울을 맞고 있다.
이제 소로가 앞서 칭찬한 느릅나무가 남았다. 그중에도 잎이 작은 참느릅은 아직까지 고운 주름을 남긴 채 살랑살랑 늦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종기나 종창에 효과가 있고, 120년 동안 물속에서 워털루 다리를 받쳤을 만큼 목재도 튼실하다. '느릅나무 주변의 마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삶의 원숙함과 운치를 발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열매가 없는 것은 흠이다.
산야에서 끝까지 늠름한 것은 그래도 상록수다. 소나무, 잣나무, 대나무, 주목 등은 계절의 변화에 무심하다. 그러나 이들 역시 궁궐 기둥의 영광을 누리고, 선비들의 화선지를 장식할지언정, 과일이나 꽃이 있을 리 없다. 한여름의 그늘 또한 빈약하지 않은가.
나무는 완벽하지 않다. 꽃이 아름답고, 잎이 고우며, 열매가 맛있고, 재목까지 훌륭한 나무는 없다. 사람도 그렇고, 보통사람과 지도자가 다르지 않다. 절대선이나 절대악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영욕과 남과 다른 개성이 있을 뿐이다.
12월의 지도자를 선택할 때 겨울 나무를 생각하자. 모든 것을 두루 갖춘 후보는 더이상 없다. 시대가 요구하는 덕목이 중요하다. 그리고 '열매의 수확'을 원하는지, '목재의 쓰임'을 긴히 여기는지, '꽃잎의 용도'를 중시하는지를 알면 된다. 그러면 선택기준이 한결 명료해진다.
(20071114 국민일보/ 26면/ 손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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