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한국형 스릴러 장르를 확장시키다 <우리동네> 정길영 감독
기사입력 : 2007.12.03 17:12조회수 : 11191
<우리동네>는 정길영 감독의 첫 연출 데뷔작이다. 시나리오와 연출까지 몸으로 훈련한 열정적인 신인 정길영 감독은 이제 겨우 시작이라고, 아직 보여줄 것이 많다고 말한다. 최종적으로 뚜껑은 관객이 여는 것이지만, 일단은 감독의 자신감을 믿어도 좋을 듯하다.
영화 일은 연애와 비슷하다 - 수많은 영화학도들이 감독의 길을 꿈꾼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감독의 꿈을 이룬 사람은 많지 않다. 부산 대학교를 졸업하고 마땅히 취직할 곳을 찾을 수 없었던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이라는 곳에서 영화감독의 꿈을 키운다. 그곳이라면 자신의 청춘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작은 회사에 들어갔는데 도저히 적성이 맞지 않아 그만뒀어요. 영화 일이라는 것이 연애와 비슷한 것 같아요. 가끔은 자존심을 버려야 할 때도 있고, 한 번 찍어 안 넘어간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죠.”영상원을 졸업하고 난 후 그가 처음 시작한 영화 관련 일은 발전 기사였다. “발전 기사의 눈으로 현장을 체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감독이 현장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현장을 지휘하지 못하고 헤매는 감독들을 보면서 나는 나중에 저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죠.”
<폭력의 역사>를 모델로 삼았다 - 정길영 감독이 <우리동네>를 연출하면서 모델로 삼은 영화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였다. “<폭력의 역사>를 보면 영화가 정적이에요. 이 영화에서 크로넨버그는 등장인물의 관계를 통해 폭력의 역사, 더 나아가 미국의 역사를 우회적으로 이야기해요.” 그가 <우리동네>를 연출한다고 했을 때 영상원 선배들은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될 거라고 겁부터 주었다. “하도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겁을 먹었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작사로부터 받은 압력은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의견이 다였어요”
연쇄살인마가 주인공이다 - 영화 <우리동네>는 한 동네에 사는 두 살인마 경주(오만석 분)와 효이(류덕환 분)를 앞세워 짜릿한 긴장감을 유발시키고, 모든 진실을 알게 되는 형사 재신(이선균 분) 캐릭터를 통해 사건을 극복해 나가는 심리적 공포감을 동시에 제공한다. “미국 같은 경우 드라마 <덱스터>를 비롯해서 영화 <헨리:연쇄살인범의 초상>, <미스터 브룩스> 같이 연쇄살인마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가 많아요. 그런데 한국 영화로서는 우리영화가 처음 인 것 같아요. 그런 점 때문에 제작이 어려웠고 배우들도 선뜻 나서려고 하지 않았어요. 주인공이 별다른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것에 거부감을 가진 사람도 많았고요. 하지만 우리영화가 길을 터놓았으니 앞으로는 이런 시도가 활발해질 거라고 생각해요.”
인물의 심리를 부각하고 싶었다 - 한 동네에 두 명의 살인마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대결을 벌인다. 한국영화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설정이다. 척박한 한국영화 스릴러 시장을 생각할 때, 정길영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한 <우리동네>는 얼핏 대담해 보인다. “<우리동네>의 각색, 연출 제안을 받고 10개월 간 작업을 하면서 장르적 관심 외에도 내용적으로 인간성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좋은 틀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틀 안에서 내용, 형식 양쪽의 장점을 살리기 위해 노력했죠.” 정길영 감독은 촬영감독과 컨셉을 잡을 때부터 인물의 심리를 부각하고 싶어했다. 그가 원한 것은 이야기의 호흡은 느리지만 마지막에 울림을 줄 수 있는 스릴러 영화였다. “생각보다 영화가 더 차분하게 나온 것 같아요(웃음). 영화를 찍으면서 능력의 한계도 많이 느꼈지만, 그 한계선상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살인범의 심리를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싶었다 - “만약 <우리동네>가 단순히 등장인물들이 처한 위기상황 돌파에 초점을 맞춘 스릴러 영화였다면 안 했을 것 같아요. 영화란 감독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명확해야 하거든요. 처음 읽은 시나리오에 그런 목표점이 있어서 좋았어요.” <우리동네>는 분명 기존의 스릴러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인범의 심리에 접근해간다. <우리동네> 같은 영화의 최고의 가치야말로 그런 색다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관객들도 이 영화를 과연 감독의 의도대로 즐겨줄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미국 박스오피스에서 1위를 한 작품들을 살펴보면 작은 스릴러 영화가 의외로 많아요. 관객들이 즐겨 찾는 장르 중 하나이니까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아직 스릴러 장르가 정착이 안 된 것 같아요. 장르영화의 공식에서 변화를 준 <우리동네>가 한국 전체 장르영화의 활성화에 힘을 보탤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결코 과거장면이 많은 것이 아니다 - <우리동네>의 시나리오 초고가 나왔을 때 지인들은 그에게 과거장면이 많다는 지적을 했다. 관객에게 끊임없이 긴장감을 주는 스릴러가 되기 위해서는 과거장면을 줄여야 한다고 그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했다. “정말 그런가? 판단이 잘 서지 않아서 우리랑 영화적 구도가 비슷한 다른 영화를 비교해 보았어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비교해 봤는데 별 차이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이대로 밀고 나갔죠.”
스릴러 장르를 배반하다 - 정길영 감독은 <우리동네>를 연출하면서 스릴러 영화의 관습적인 장치들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갔다.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일부 평자의 글에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그는 장르의 법칙은 없다고 못을 박는다. 7전8기 끝에 <극락도 살인사건>을 만든 김한민 감독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는‘관객들이 따라와 줄 때 장르의 법칙이 만들어진다’고 강조했다. “장르라는 것이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관객들에게 익숙한 거잖아요. 이런 예가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락 밴드인 롤링스톤즈가 80년대 디스코 열풍이 불때 ‘Miss you’라는 노래를 발표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노래가 발표 됐을 때 팬들의 화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어요. 롤링스톤즈 너마저 디스코를 할 줄 몰랐다는 거였죠. 이 영화를 보고 다른 스릴러 영화에 비해 긴장감을 떨어져서 아쉬움이 들었다면 그것은 장르를 배반했기 때문에 느끼는 심리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그 노래, 팬들의 불만 섞인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빌보드차트에서 1위를 했거든요.“
제작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다 - 지금은 충무로에서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는 세 배우지만 캐스팅 당시만 해도 상황이 많이 달랐다. “작년 9월에 오만석, 이선균, 류덕환이라는 배우 캐스팅 명단이 확정됐어요. 그런데 그때는 이 배우들의 인기가 많은 편이 아니라서 투자를 받는 데 어려움이 많았어요.” 지금 상황으로는 믿기 힘든 일이지만 그때는 정말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다. 캐스팅이 바뀌지 않으면 제작비를 구하기 힘든 상황이 찾아왔지만 정길영 감독은 저돌적으로 밀어붙였다. 캐스팅 명단이 바뀌지 않으면 15억의 제작비로 영화를 완성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 찾아왔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제작비를 구하기 쉬운 배우를 캐스팅해서 영화의 느낌마저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작비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떠오르는 배우로 하고 싶었어요. 캐스팅 당시에는 오만석 씨의 힘을 믿고 있었죠. 그 때 오만석 씨가 <포도밭 사나이>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쌓아서요(웃음).”
관객과 머리싸움을 하고 싶지 않았다 - 정길영 감독은 이 영화를 관객과 머리싸움을 하는 스릴러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효이가 여자들을 죽이는 이유, 경주가 연쇄살인마를 추리하는 과정 등 그런 것들은 전형적으로 가고 싶었어요.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런 부분은 타협할 수 있었어요.” 영화 속 세 인물의 과거장면을 보고 어떤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동네>에 대한 느낌과 평가는 나뉠 수밖에 없다. “제가 의도한 방향과는 관객들이 다르게 느끼는 일부 장면을 타이트하게 갔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은 있어요. 하지만 지금의 결과물에 대해 후회는 하지 않아요”
사람이 되지 못할 망정 괴물은 되지 말자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과정에서 자신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영화 클라이막스에서 효이는 경주에게 ‘솔직히 말해봐, 죽이고 싶었지’라는 말을 한다. 이 장면에서도 드러나듯이 정길영 감독은 <우리동네>를 단순한 선악대결구도나 반전에 의지하는 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극중 경주는 흔들리는 자아라고 보면 돼요. 효이처럼 뻔뻔하게는 못하지만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보통 사람이죠. 이선균씨가 연기한 재진 같은 경우 직업도 경찰이고 우리 안에 있는 도덕적 자아예요. 덕환이가 연기한 효이는 프로이드가 말한 도덕적 욕망과 원초적인 욕망에서 왔다갔다 하는 인물이고요.”
정길영 감독이 꼽은 명장면 - <우리동네>에는 스타일을 집약하는 결정적인 장면이 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경주의 화장실 장면이다. “영화에서 첫 살인장면인데, 별 이유 없는 살인과정을 관객들이 잘 따라갈 수 있게 연출해야 했어요. 때문에 이 장면은 <우리동네> 촬영 과정 중 유일하게 현장에서 바로 재 촬영한 장면이기도 하지요. 그만큼 욕심을 낸 신이었고,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덕분에 개인적으로 매우 만족스런 장면이 되었어요.”
살인자들과의 인터뷰 - <우리동네>를 연출한 정길영 감독은 스릴러 영화의 관습을 비틀면서도 주제의식을 또렷이 새겨 넣었다. 이 영화가 얼마만큼의 관객을 동원할지 알 수 없지는 정길영 감독은 지금까지와 조금 다른 스릴러 영화로 관객들에게 다가갈 거라고 자신했다. “<우리동네>는 등장인물의 관계 그 자체에 주된 관심을 두는 스릴러예요. 물론 형식적으로 기존 스릴러의 관습 내지 공식의 장점을 다른 스릴러 영화보다 더 세련되게 표현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어요.” 효이의 심리를 그리면서 그가 많이 참고한 책은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범죄 심리분석관으로 근무한 로버트 K 레슬러가 미국의 연쇄살인범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였다. “여자에 대한 열등감과 죄의식을 갖고 있는 효이의 모습을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효이는 자칫 여타 스릴러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단순한 싸이코 패스로 그려질 가능성이 높았는데 그걸 피하기 위해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배우들과 살인마의 심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정신과 의사를 만나 시나리오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도 했고요. 그들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나 들었는데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 같은 위원들이 과거에 아빠가 엄마를 때리는 것을 봤을 가능성이 많다는 거였어요. 나라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못할 일이라는 심리분석에서 나온 이야기였죠.”
장르는 중요하지 않다 - 정길영에게 감독으로서 자양분이 된 것은 '영화' 보다 '책'이었다. 유년기에 탐독했던 책들은 그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정길영 감독은 장르를 구분 없이 앞으로 만들 작품에서도 인간의 감정을 화면 위에 담아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이안 감독을 예로 들면서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에게 있는 장르는 수단일 뿐 목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안 감독은 <색, 계>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거든요. 장르만 약간 다를 뿐이죠. 제가 다음 작품으로 준비 중에 있는 것은 휴먼코미디인데 거기서도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비슷할 것 같아요.”
영화를 잘 만든 감독이라는 말을 듣고 싶다 - 정길영 감독이 시간이 흘러 관객에게 듣고 싶은 말은 예술가라는 거창한 칭호보다 '영화를 잘 만든 감독'이라는 솔직한 수식어다. “인간을 크게 두 분류로 구분한다면 기독교형 인간과 그리스 신화형 인간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스 신화형 인간의 특징은 내세를 고민하지 않아요. 반면 기독교형 인간은 죄의식이 있어요. 저 같은 경우에는 그리스 신화형 인간과 비슷한 것 같아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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