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울고 사랑하지요, 암환자도 당신처럼 …
[중앙일보] 카툰집 『암은 암, 청춘은 청춘』 펴낸 서른살 조수진씨 논쟁중인 댓글 (3)
항암치료 뒤에 “옷이 날개가 아니라 머리털이 날개”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조수진씨는 “그래도 두상이 동그래서 나름 괜찮다는 말을 듣는다”며 밝게 웃었다. 김형수 기자
그를 만나던 날, 5월 날씨치곤 꽤나 더웠다. 전화로 “예쁜 가발 쓰고 갈께요” 했던 그는 강아지 문양이 들어간 연분홍색 두건을 두르고 나타났다. “사진 찍어야 하는데”라는 기자에게 “괜찮아요. 이렇게 더운 날 가발 쓰면 땀 줄줄 흐르고, 오히려 우울하거든요”라며 하하하 소리내 웃었다.
뭐라고 불러야할까 잠시 망설이다 ‘카투니스트’라 칭하기로 했다. 2005년 갑작스럽게 임파선암을 발견한 후 4년여 겪은 투병생활을 만화에 담아 『암은 암, 청춘은 청춘』(책으로 여는 세상)이란 투병 카툰집을 발간한 만 서른살의 카투니스트 조수진씨. 그의 필명은 ‘오방떡 소녀’다. “암에 걸려 머리가 빠지고 나니 얼굴이 진짜 오방떡 같이 둥그래져” 붙인 별명이란다.
◆스물일곱에 찾아온 낯선 친구=암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보기에도 평탄한 삶”이었다. 부모님과 언니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막내딸에다가 공부도 잘해 대전과학고를 거쳐 서울대에 척척 들어갔다. 이과가 적성에 맞지 않아 사회복지학과로 과를 옮기긴 했지만 ‘타고난 성실성과 소심함’ 덕에 “A학점 아닌 것을 끝내 받아보지 못하고” 졸업한 모범생이었다. 대기업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한참 일을 배우던 무렵, 암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기침 심하고, 류마티스 증상이 나타나 약만 열심히 먹었는데 알고보니 임파선암 3기였어요. 항암·방사선 치료를 열심히 받았는데 후유증으로 ‘호상성 폐렴’에 걸렸죠. 어렵게 폐렴을 고치고 나니까 글쎄 암이 재발했다지 뭐예요. 두번째 항암 치료를 받다가 너무 힘들어 ‘나 치료 그만둘래’라며 병원을 뛰쳐나왔어요.”
분명 자기 이야기인데 마치 어제 TV에서 본 드라마 줄거리를 전하듯 밝은 목소리다. “책이나 TV 보면 나오잖아요. ‘하루를 살더라도 인간답게 살래’라는 환자들, 제가 딱 그 기분이었다니까요”라며 농담도 했다. 2년여 여러 요양원에 머물다 올해 초 몸이 다시 안좋아져 병원에 갔는데 암이 폐와 뼈 등에 전이됐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지금은 부모님이 계신 대전과 작업실이 있는 제주도를 오가며 치료를 받는 중이다.
◆암 환자라도 청춘은 청춘이죠=카툰을 그리기 시작한 건 2007년. “외로웠어요. 요양원에는 TV도 인터넷도 없고. 저처럼 투병하는 사람들과 뭔가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만화가가 꿈이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암을 통보받았을 때 기분을 담은 카툰 한 편을 처음으로 그렸다. “그림 완성하고 나서 언니랑 엉엉 울었어요. 맺힌 게 많았었는지, 그걸 그리고 나니까 속이 뻥 뚫리는 듯 후련하더라구요.” 일주일에 하나씩 카툰을 그려 인터넷 사이트 다음(Daum) 카페 ‘암과 싸우는 사람들’에 올리기 시작했다. 반응은 폭발적. ‘웃으면 안되는데, 너무 재밌어요’, ‘오방떡 소녀님 만화 보는 낙으로 살아요’ 등 댓글이 수십개씩 달렸다.
그의 카툰에서 힘들었던 투병 기억은 때론 짠한, 때론 큭큭 웃음이 터지는 이야기로 변모한다. “커다란 못을 온힘을 다해 눌러 뼈를 뚫은 후, 쑥쑥 펌프질을 하는 것 같았던” 골수검사의 기억, 자꾸 빠지는 머리카락 때문에 ‘골룸은 싫은데’라고 중얼거렸던 순간, “평생 널 간호하며 살아도 괜찮을 거 같아”라고 말해준 남자 때문에 가슴 두근거렸던 연애담 등이 동글동글 귀여운 그림과 함께 담겼다. “사람들은 암 환자라고 하면 그저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렇지 않거든요. 암 환자들도 울고 웃고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걸, 암에 걸렸지만 사랑도 하고 ‘청춘은 청춘’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암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그는 자신의 만화가 ＂암이라는 소식을 듣고 나처럼 당황했을 초보암환자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받고 돌아오는 길에 “지금 당장 터널이 무너졌으면” 했던 적도 있고, 북한과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는 뉴스에는 “전쟁이 일어나 다같이 죽었으면”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처음엔 수없이 ‘왜?’라고 물었죠. 식생활이 안좋아서? 운동을 안해서? 그런데 아무리 물어도 답이 없더라구요. 이제는 생각해요. ‘이 경험을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으면 된다’ 라고. 암에 걸리고 난 후 주변 사람들의 따뜻함과 소중함 등 너무 많은 걸 이미 얻었어요.”
사실, 그와의 인터뷰는 내내 시끄러웠다. 긴 투병기간 동안 만화라는 만화는 다 읽어버려 더이상 볼 게 없다는 이야기랑, 아프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미소년의 세계’에 눈을 떴다는 주제로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 “다음에 만나 계속 얘기하자”며 아쉽게 헤어졌다. 그의 명랑함에 동화돼 그가 아끼는 꽃미남 가수의 사인을 받아 주겠다는, 실없는 약속까지 하고야 말았다.
이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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