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서정시대] 삶이 재난 영화 같을지라도… 친절하라, 경외하라
김지수 조선비즈 문화전문기자
입력 2022.12.15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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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운 좋게 좋은 사람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접속해 인터뷰를 했다. 깊은 고민에 무릎이 꺾여 산책로 벤치에 주저앉아 눈물을 찔끔거릴 때마다, 최적의 타이밍에 나타나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 준 이는 나의 ‘인터뷰이들’이었다. 짐작하겠지만 올해 인문학계를 강타한 전복의 키워드는 ‘후회, 슬픔, 적응’이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지식 생태계에는 대격변이 일어났다. 승리, 생산성, 기쁨, 행복, 번영, 자본이라는 군림의 언어가 가고 다정함, 안전, 우정, 친구, 슬픔, 반성, 후회 등 심리 자원의 근본을 파고드는 돌봄의 언어가 살아났다.
각 언어는 모두 매혹적이고 다양했으나, 그 바탕은 다르지 않았다. 고난을 빼고 인생을 설명할 길은 없다는 것. 우리 모두 인생이라는 ‘재난 영화’의 주인공들이라는 것. ‘최선의 고통’을 쓴 예일대 심리학자 폴 블룸은 예리했다.
“우리가 열망하는 행복한 삶은 신기루며, 진화의 본질은 고통을 통한 개선”
이라는 그의 설명을 들었을 때, 나는 절망하기보다 안도했다. 내가 못나거나 불운해서가 아니라, 더 진실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추구하는 인생 여정에서 고난은 수반될 수밖에 없다는 것. 이보다 위로가 되는 말이 어디 있을까. 우리의 뇌는 쾌락만큼이나 고통을 환대하며, 인간 본성은 안락한 감각만큼 의미 있는 성장을 추구한다는 발견은 꽤 믿을 만하다.
위대한 대서사와 고전 영화의 주제 역시
‘고난을 겪어도 파괴되지 않는다’
가 아니던가. 자연 그대로의 생이든, 의미 있는 성장이든, 고난은 동지 섣달 그믐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 그 어둠의 터널은 친절이라는 등불 없이는 통과할 수 없다.
‘머리 검은 짐승은 고난을 안고 사니, 서로 친절해야 한다’.
작고한 파독 간호사 출신 화가 노은님이 들려준 이 말을 나는 좋아한다. 사는 게 벌서는 것처럼 억울할 때마다, 노은님은 어머니가 들려준 이 말을 붙잡고 타향살이를 견뎠다고 한다. 그래선지 그의 그림은 억압 없는 돌연변이들의 천국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박찬욱보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에 마음이 끌리는 이유도 비슷하다. 박찬욱의 주인공들이 고난을 알고 걸어가는 꼿꼿하고 젠틀한 사람(‘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이라면, 봉준호의 주인공들은 고난을 안고 사는 불운하고 친절한 사람들(‘괴물’ ‘기생충’)이다.
고난이 장기화될수록, 우리는 안과 밖의 경계가 명확하게 구획된 ‘개인’이 아니라 필멸의 애틋함으로 상호작용하는 ‘네트워크’ 그 자체로 살아갈 것이다. 프랑스의 적응 전문가 크리스티앙 클로가 햇빛도 시계도 없는 동굴에서 40일간 집단생활하는 ‘딥 타임’ 프로젝트를 실험하며 발견한 진실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클로가 극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인간 정신의 필수 자원으로 꼽은 것은 첫째 친절, 둘째 경외였다. 잠에서 깬 동료를 안아주고, 경외감을 품은 채 동굴 탐사를 지속했기에 어둠 속의 ‘극한 인류’는 내일의 희망을 유지했다.
코로나 인류를 각성시킨 리부트 자원으로 슬픔과 후회의 재발견도 빼놓을 수 없다. ‘비터스위트’를 쓴 수전 케인에 따르면, 인간 감정의 디폴트는 기쁨이나 행복이 아니라 ‘편안한 슬픔’이다. 보통의 어린아이들도 해 질 녘이나 눈부신 지평선 앞에서 슬퍼한다. 사실이 그러하기에 떠남과 헤어짐을 힘겨워하는 아이들에게 ‘언젠가 다시 보게 될 것’이라는 말보다 작별의 고통이 삶의 일부라고 말해주어야 한다.
시인 제라드 맨리 홉킨스는 ‘봄과 가을’이라는 시에서 소녀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인간이 태어난 것은 시들기 위해서란다. 네가 슬퍼하는 것도 마거릿, 너 자신인 거야.’
삶에는 빛과 어둠, 출생과 죽음, 달콤함과 씁쓸함이 서로 붙어있다. 아이러니를 인정해야 웃으면서 슬픔을 누릴 수 있지 않겠는가.
2022년의 끝에서, 전 세계 2만여 명의 후회를 분석한 ‘후회의 재발견’의 대니얼 핑크 같은 사려 깊은 미래학자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다. 제자리를 맴도는 반추로 괴로워하지 말고, 내일을 위해 ‘후회를 최적화’하라고 다정한 미래학자는 충고한다. 유한한 시간을 바라보는 슬픔과는 달리, 후회는 시간을 자의적으로 뒤섞는 고도의 스토리텔링 활동이다.
후회를 뒤집어 보면 우리가 삶에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반성 후회는 안정의 욕구를, 대담성 후회는 성장과 경험의 욕구를, 도덕성 후회는 선함의 욕구를, 관계성 후회는 사랑과 친절의 욕구를 드러낸다. 2만여 명의 경험담에서 추출된 가장 보편적인 후회는… 하지 않은 일에 대한 후회였다. 부디 다가올 2023년에는 그 일을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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