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관련핫이슈[칼럼 연재] 문창극 칼럼세상은 참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일이 종종 있다. 살아보려고 애쓰고, 땀 흘려 일하는 사람에게 그 개인도 어쩔 수 없는 불행이 닥치곤 한다. 그 불행이 너무나 커 자신의 힘으로,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경우도 가끔 있다. 이를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최진실씨의 죽음을 우리는 과연 운명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녀는 또순이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그녀는 일류스타가 된 후에도 건전하게 살아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낭비에 빠지기 쉬운 연예계에서 그녀는 저축왕까지 되었다. 이혼이라는 어려움을 겪고도 다시 일어났다.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운명에게 지고 만 것일까.
캐나다 로키 같은 큰 산에 가보면 주변은 울창한데 어느 일부분은 나무가 죽어 황폐한 곳이 있다. 눈사태가 휩쓸고 간 부분이다. 나무들은 생존하기 위해 애를 쓴다. 주변 나무보다 덜 자라 햇빛을 못 받게 되면 말라버리기 때문이다. 나무들은 치열한 햇빛경쟁을 하며 거기서 살아남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과 관계없이 눈사태가 하필 그 지점을 덮치게 되면 나무들은 삶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눈에 휩쓸려 부러지고, 눌려 죽고 만다. 나무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억울한 일일 것이다. 그것이 그 나무의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에게도, 국가에게도 그런 눈사태가 없으란 법이 없다.
그러나 나무와 달리 사람과 국가는 눈사태를 피할 길을 미리 준비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도 국가나 사람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군주론 제25장에서 홍수 예를 들며 “운명은 자신에게 대항하기 위해 아무런 역량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그 위력을 떨치며, 자신을 제지하기 위한 아무런 제방이나 둑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곳을 덮친다”고 비유하고 있다(『군주론』, 강정인·김경희 옮김). 운명이라는 피할 수 없는 힘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상대의 역량에 따라 그 힘은 다르게 작용한다. 최진실씨의 경우 인터넷에서 아무리 거짓으로 비방을 해도 그것을 이겨낼 내적인 준비가 있었다면 이렇게 끝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밤 그녀가 동료들과 술을 마시지 않고 기도나 참선을 했었다면 운명의 힘은 그녀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는 우리의 잘못이나 의지와는 전혀 관계없이 우리를 힘들게 만들고 있다. 어쩌면 지금 눈사태 직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충분히 준비하고만 있다면 그런 눈사태를 피할 수 있다.
문제는 운명이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어떤 때는 눈사태로, 어떤 때는 태풍으로, 어떤 때는 산불로 모습을 바꾼다. 따라서 그 대응이나 준비 역시 그에 알맞아야 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일수록 과거의 성공에 매달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외환의 확보가 급한데 달러값이 오른다고 금쪽같은 달러를 마구 푸는 것은 바로 과거의 방식에 매달리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눈사태를 막아주었던 구조물은 산불에는 효력이 없는 것이다.
눈사태가 났던 지역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곳에서 기적을 발견할 수 있다. 부러진 나무, 휩쓸린 풀 더미에서 새싹이 돋아나는 것이다. 눈사태가 나서 주변은 죽고 말랐지만, 생명을 간직하고 있던 뿌리나 나뭇등걸만 있다면 거기에 새 생명이 움트는 것이다. 아무리 큰 나무도 생명을 잃으면 순식간에 썩어 넘어진다. 그러나 아무리 보잘것없는 작은 풀이라도 생명을 간직하고 있으면 눈보라를 이겨내고 꽃을 피운다. 이것이 생명의 비밀이다. 최진실이 생명을 끊지만 않았다면 생명의 비밀에 의해 그녀에게 또 다른 삶의 길이 열렸을 것이다.
최진실이 스스로 생명을 끊은 것은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은 희망이다. 희망만 있다면 우리는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 우리는 착한 사람, 선한 사람에게 왜 시련이 닥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 시련과 고난이 장차 올 더 큰 승리나 기쁨을 위한 것이라는 희망만 있다면 어려움을 견뎌낼 수 있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대한의 독립은 오고야 만다는 희망이 우리 선조들을 눈보라 치는 만주벌판에서 살아남게 만들었고, 가난했던 때, 우리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었다. 국가부도 사태 때 금 모으기를 한 이유도 우리가 더 큰 희망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할수록 우리는 운명의 힘을 이길 준비가 필요하다. 아니 더 절실한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