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18 05:45 강원도 정선읍에서 한 시간 꼬박 오르막 국도를 따라가면 해발 780m 백봉령에 닿는다. 마루턱에 서자 멀리 동해까지 거침없이 시야가 터진다. 새해 해맞이 대목 말고는 오가는 차 뜸한 고개에 '향토음식점' 예닐곱이 늘어섰다. 저마다 나름대로 가게 이름을 내걸 만도 하지만 무던하게 1호, 2호 하는 번호만 달고 있다. 음식도 수더분하다. 감자옹심이 한 양푼, 감자전 두 장이 5000원씩이다.
▶장작 때는 난로 곁에서 후루룩 옹심이를 떠먹는다. 멸치와 황태머리 우려낸 국물이 구수하다. 애호박과 홍고추 고명이 달짝지근하고 칼칼한 맛을 더한다. 김 가루와 깨소금이 감칠맛을 낸다. 땅에 묻어둔다는 김치들이 시원하다. 정작 새알 격인 옹심이는 쫄깃할 뿐 아무 맛이 없다. 덤덤하다. 통감자를 강판에 갈고 체에 밭쳐 가라앉힌 앙금을 감자 찌꺼기와 반죽해 떼어 넣은 녹말 덩어리다.
▶감자와 콩·밤을 시루에 찐 감자뭉생이, 감자수제비에 팥·콩 넣은 죽 감자범벅, 투명해서 팥소가 보이는 감자송편…. 강원도 감자 음식은 투박하다. 거친 땅에서 감자 일궈 영혼의 음식으로 빚어낸 어머니의 손품과 온기가 배 있다. 요즘엔 손맛 잃고 너무 매끈해져서 얼마 전 강릉 사람들은 감자전을 그곳 말 '감재적'으로 부르기로 했다. '동글동글 잘생긴 것을 믹서에 갈면 감자전, 울퉁불퉁 못생긴 것을 강판에 갈면 감재적'이란다.
▶강원도에선 감자가 한반도에 들어온 지 23년 만인 1847년 농사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감자는 햇빛 짧게 들고 물 귀한 산골에서도 잘 자랐다. 낮밤 기온 차가 클수록 많이 거두고 맛있고 신선해 강원도 기후에 딱 맞았다. 감자와 강원도는 한몸이다. 춘천 동면 강정리는 감자 농사 잘된다 해서 감잣골이다. 삼척 도계읍 감재골, 동해 삼화동 감재들, 영월 영월읍 감자골도 있다. 강원도에 못 판 감자가 8000t이나 쌓였다고 한다. 작년에 풍년이 들었지만 값은 절반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강원도 기업·군·공무원이 알음알음 갖가지 경로로 감자 팔기에 나섰다. '감자 사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말 "감자합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예일대가 세계 7만여 식품의 영양가를 따졌더니 작물 중에 감자만 A학점 91점을 받았다. 감자는 열(熱)에도 파괴되지 않는 비타민 C가 사과 여섯 배 들었다. 금세 배불러도 여느 곡물 열량의 절반밖에 안 돼 다이어트에 좋다. 맛이 담백해 어떤 요리에도 잘 어울린다. 괴테는 감자를 '신(神)의 은혜'라고 했다. 그 은총을 찌고 굽고 볶고 지지고 끓이며 누려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