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3.20 05:39 勝戰부터 최후까지 날씨와 인연
'人工강우 작전' 자무카에 맞서 번개 두려워하지 않고 전세 역전
800년前 나무 나이테 분석 결과 몽골제국 확장기에 高溫多雨로
초원 풍성해져 기마병 馬力 증강
이영완 산업부 과학팀장 "몽골인 모두가 두려워하는 번개를 자네는 왜 두려워하지 않았나?" "나에겐 더 물러날 곳이 없었네. 맞서니 두렵지 않았네."
2007년 나온 영화 '몽골'에서 주인공 테무친, 즉 칭기즈칸이 평생의 경쟁자였던 자무카와 운명을 건 일전(一戰)을 벌이고 나서 나눈 대화이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것은 병사의 수도, 전략도 아니었다. 바로 번개였다. 전투가 벌어지려는 순간 하늘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이내 번개가 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양군(兩軍)의 병사들은 모두 땅에 엎드려 두려움에 떨었다. 오직 테무친만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병사들을 독려했다. 사기가 높아진 테무친군(軍)의 공격에 자무카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칭기즈칸은 어떻게 번개를 두려워하지 않았을까. 그의 말대로 벼랑 끝에 몰린 사람의 오기였을까. 당시 살았던 나무는 이와 다른 설명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과학자들이 나이테로 당시 날씨를 역추적했더니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비가 많이 내려 번개가 잦았고, 유독 칭기즈칸이 이에 잘 적응해 번개에 익숙했다는 것이다.
미국 웨스트버지니아대의 에이미 헤슬(Hessl) 교수와 컬럼비아대의 네일 페더슨(Pederson) 교수는 2010년 몽골에서 나이가 1100년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는 소나무를 발견했다. 연구진은 나무의 나이테 모양을 통해 몽골 제국이 성립되던 800여년 전 기후가 어땠는지 알아봤다. 나무는 환경이 좋으면 빨리 자라고 그런 해는 나이테가 굵어진다. 나무가 자라던 당시의 기후를 알려주는 타임캡슐인 셈이다.
분석 결과 1180년에서 1190년 사이에는 심한 가뭄이 있었지만, 1211년부터 1225년 사이에는 이전과는 달리 비가 자주 내리고 기온이 상승하는 등 상당한 기후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시기는 칭기즈칸이 여러 부족을 통일해 본격적인 몽골 제국을 형성하던 무렵이다. 연구진은 "당시의 기후 조건은 과거 1000년을 통틀어 가장 습하고 따뜻한 기후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일러스트=김현지 기자 춥고 건조했던 기후가 습하고 따뜻하게 급변하면서 칭기즈칸과 몽골 제국에 날개를 달아줬다. 연구진은 지난 10일 '미 국립과학협회보(PNAS)' 인터넷판에 발표한 논문에서 "갑자기 증가한 습기는 전에 없는 목초지의 생산성 증대를 가져왔고, 이는 말 그대로 '마력(馬力)'의 증가로 이어졌다"고 밝혔다.
당시 말은 몽골 성인 남성 1명이 평균 5마리를 키울 정도로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맘껏 풀을 뜯고 힘이 세진 말에 오른 몽골 기마부대는 우리나라와 중국·러시아·중동 지역은 물론 동유럽까지 뻗어가 세계 육지 면적의 20%를 차지하는 대제국을 만들었다. 연구진은 "기후변화가 유일한 원인은 아니었겠지만 분명히 카리스마를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 군대를 키우고 권력을 집중시키는 데 이상적인 조건이었음에는 틀림없다"고 밝혔다.
땅만 넓힌 것이 아니었다. 몽골인의 DNA도 전 세계로 퍼졌다. 지난달 영국 런던대 연구진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세계 곳곳에서 모은 1490명의 DNA를 분석한 결과, 동으로는 동북아시아와 서로는 터키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몽골인의 유전자 흔적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몽골인의 유전자가 유입된 시기는 1250년에서 1300년 사이로, 몽골 제국이 아시아 대부분과 동유럽을 정복한 시기와 일치했다.
그런데 칭기즈칸과 자무카의 전쟁 당시 내린 비에 대해 재미있는 해석을 하는 과학자도 있다. 당시 비가 늘었다지만 전쟁을 벌인 날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칭기즈칸의 카리스마가 빛을 발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변희룡 부경대 환경대기과학과 교수는 "기록이 맞는다면 당시 내린 비는 인공강우(人工降雨) 기술의 결과"라고 말했다. 자연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이 칭기즈칸을 도왔다는 말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비를 부른 것은 칭기즈칸이 아니라 자무카였다. 자무카는 무당에게 신비의 돌을 태워 칭기즈칸 진영에 비를 내리도록 했다고 한다. 비에 약한 몽골인의 습성을 이용해 사기를 꺾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칭기즈칸이 비와 천둥·번개에도 흔들리지 않아 오히려 역공을 받은 셈이다.
먼저 돌을 태워 재가 하늘로 갔다면 구름 속의 수분을 모으는 응결핵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변 교수는 "늘 흙먼지가 있는 몽골에서 응결핵이 부족해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변 교수는 대신 불을 피워 상승기류를 만든 것이 비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상승기류를 타고 올라간 공기는 100m마다 섭씨 1도씩 온도가 떨어진다. 이 과정에서 습한 공기가 수분이 되고 구름을 만든다.
칭기즈칸은 1227년 세상을 떴다. 그의 사인(死因)을 두고 낙마(落馬) 사고로 입은 상처 때문이다, 독화살에 맞았다, 포로 출신인 후궁이 칼로 찔렀다, 생식기를 물었다 등 설이 분분하다. 그중에는 벼락설도 있다. 이는 교황청의 사절이 쓴 글에서 비롯됐다. 번개는 구름 속에서 전류가 흐르는 것이고, 벼락은 구름과 땅 사이로 전류가 흐르는 현상이다. 벼락설이 맞는다면 칭기즈칸은 시종일관 악천후 속에서 산 정말 극적인 삶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