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19/2014071900749.html?life
'좋은 죽음'이 곧 '좋은 인생'
박돈규 기자 기자의 다른 기사보기 기사100자평(0) 페이스북 트위터 조선블로그
요즘 싸이 공감 MSN 메신저스크랩메일인쇄입력 : 2014.07.19 11:16
한국, 주요 40개국 중 '죽음의 질' 32위… 자연의 순리 부정하고 임종 의료화돼
환자에게 죽음 알려 정리할 시간 줘야…
쓸데없는 치료 피하고 죽음과 친구하면 남은 시간 행복하고 뜻깊게 보낼 수 있어
'9988234'. 노인들끼리 덕담처럼 주고받는 숫자다. '99세까지 88하게 살다가 2~3일 아프고 죽는다(4·死)'는 뜻. 죽는 것도 두렵지만 죽음이 임박했을 때 아픈 것도 싫다.
2010년 영국 경제지 이코노미스트가 국가별 '죽음의 질'을 조사했다. 임종을 앞둔 환자가 얼마나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살폈는데 한국은 OECD 회원국을 포함한 40개국 중 32위(10점 만점에 3.7점)에 그쳤다. 아득해진다. 영국이 1위(7.9점), 미국이 9위(6.2점), 일본이 23위(4.7점)였다.
◇죽을 때 비참한 나라
응급실은 입원을 기다리는 환자로 넘쳐나고 대형병원은 늘 병실이 부족하다. 말기 환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다. 이 나라 병원은 그들이 숨을 거둔 다음에야 환영한다. 수익성 좋은 장례식장으로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가 쓴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엘도라도)는 임종이 갈수록 의료화되고 있다는 점을 문제로 지목한다. 질병은 의료의 대상이지만 죽음은 그렇지 않다. "죽음이 임박했다는 명백한 징후 앞에서는 받아들이는 게 순리다. 자연적인 죽음마저 부정하고 죽음을 의료화하려 시도하면서 비극이 시작된다."
영국에서 의사는 환자의 말기 상태에 대해 솔직하게 밝힌다.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진통제를 충분히 투여하고, 말기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 시설도 잘 갖추고 있다. '익숙한 환경에서 존엄을 유지한 채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통 없이 죽어가는 것'이 '좋은 죽음(Well-dying)'이다. 과거에는 우리도 집에서 맞는 죽음을 호상(好喪), 밖에서 죽는 것을 객사(客死)라 했다. 요즘엔 10명 중 7명이 병원에서 객사한다.
웰다잉은 죽음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이 있어야 가능하다. 우리 문화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가족들은 환자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숨긴다. 환자 또한 가족에겐 알리지 말라고 의사에게 부탁한다. "이런 태도는 희망 고문일 뿐 아니라 소중한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낸다."
◇"죽음을 교육하자"
이런 사회에서는 진지하게 죽음을 논하기 어렵다. "죽음을 교육하자"고 이 책은 말한다. 환자가 희망을 놓지 않도록 '하얀 거짓말'로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큰 오산이다. 그에겐 진실을 알 권리가 있다. 그래야 병에 도전할지 불필요한 치료 대신 인생을 정리할지 선택할 수 있다. "환자가 삶을 마무리할 시간마저 가로챈다면 도덕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문장에 수긍하게 된다.
사람은 죽기 전에 최소 한 가지 이상 연명치료를 받는다. 아무도 고통스럽게 오래 살기를 바라지 않지만 막상 임종 단계에 들어가면 끝을 지연시키는 의료행위가 이뤄진다. 한국 사회에 연명의료 논란을 부른 '김 할머니'는 2009년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인공호흡기를 뗀 지 201일 만에 사망했다. 연명의료를 중단하지 않으면 과잉진료가 되고, 중단하면 법적 제재를 받을 가능성도 있다.
종교학자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는 신간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김영사)에서 "죽음을 공부해야 삶이 깊어진다"고 말한다. 인생이 6개월밖에 안 남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돌아보게 된다.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제쳐놓았던 질문들도 떠오를 것이다. 나는 제대로 살았나? 괜찮은 아버지 혹은 남편이었는가? 그 시간은 인생에서 가장 귀한 6개월일 수 있다.
◇죽는다는 사실이 삶을 바꾼다
우리는 죽음을 적극적으로 맞이하지 못하고 끌려다닌다. 중환자실로 들어가면 내가 아닌 기계가 대신 살아주는 꼴이 된다. 최준식 교수는 "끝이 다가오는 것을 피하지 말고, 쓸데없는 치료는 거부하고, 죽음과 친구가 되려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가장 좋은 임종은 몸을 벗기 직전까지 의식을 놓지 않고 가족들과 대화하는 것이라고 썼다. 영화 '엔딩노트'처럼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을 하며 남은 시간을 뜻있고 행복하게 보낼 수도 있다. "죽으러 가는 게 아닙니다. 호스피스 병동은 다른 세상으로 여행을 떠나는 터미널 같은 곳입니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타듯이 우리는 몸을 벗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날아갑니다."
애플의 스티브 잡스는 췌장암 진단을 받고 나서 죽음을 응시하며 살았다. 아침마다 거울을 보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뭘 할까' 자문했다. 2005년 스탠퍼드대학 연설에서 그는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의 종착지"라며 "인생에 이보다 훌륭한 '발명품'은 없다"고 말했다. 곧 죽는다는 사실이 삶을 바꾼다. 거룩하고 소슬하게. | |
